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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7 vs r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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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148당연히 B-59는 루이나군의 '시도'를 폭뢰 '공격'으로 오인했고 함선의 손상이 심한데도 루이나군의 폭뢰 투하로 인해 부상하지 못하다보니 산소 고갈 상태에 빠졌다. 약 4시간 동안 함선 내부에서는 이산화탄소 농도가 급증해 승조원들이 쓰러지고 있었고 인터그라드와의 통신도 불가능했다. 이 판국에 다시 함선 근처에서 폭뢰가 터지자, B-59 함장 발렌틴 사비츠키(Валентин Савицкий) 대령은 이를 전쟁 발발 상황으로 간주, 정치장교 이반 마슬렌니코프(Иван Масленников) 대령의 동의를 받아 '''탑재한 핵어뢰를 발사하려고 했다.'''[* 당시 B-59함은 '''최대 10kt의 위력을 지닌 RDS-9 핵탄두를 탑재한 T-5 어뢰들을 탑재 중이었다.'''] 다행히 부장이자 K-19 함의 생존자 중 한 사람인 바실리 아르히포프가 반대하여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부장이 발사에 반대한 후 B-59는 루이나군 항공기에 도발을 중단하란 교신을 보냈고 루이나군이 이를 받아들여 철수하자 수면 위로 부상했다. 전력도, 산소도 고갈되고 에어컨 장치까지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루이나군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아르히포프의 반대가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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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맥도날드 국방장관은 이날 저녁을 기억했다. "회의를 마치고 대통령실을 나설 때, 아름다운 가을 저녁이었다. '''그러나 곧 다음주 토요일 밤에는 아마도 살아 있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한편 공포에 질린 것은 루이나 수뇌부뿐이 아니었다. 사비에트 역시 수뇌부가 공포에 질렸다. 인터그라드의 중앙당 관리들은 가족들을 시골로 대피시키느라 소동을 벌였고 난데없이 인터그라드에서 밀려오는 사람들을 본 지방 관리들도 사태의 추이를 알게 되자 경악하였다. 사비에트 곳곳에서 미친 인터루쇼프가 엄청난 혼란 속으로 자신들을 몰고 가고 있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당시 당중앙위원회 연락부 부원으로, 연락부장 유리 안드로포프를 보좌하던 소련 정치학자 표도르 부를라츠키(Фёдор Бурлацкий)는 10월 27일 당중앙위원회의 긴급한 호출을 받고 차를 기다리던 중 동료인 알렉세이 벨랴코프(Алексей Беляков)를 만났다. 벨랴코프가 그에게 가족들을 시골로 보냈냐고 묻자 부를라츠키는 도대체 왜 가족들을 시골로 보내야 하는지 되물었고 벨랴코프는 조만간 인터그라드가 핵공격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150맥도날드 국방장관은 이날 저녁을 기억했다. "회의를 마치고 대통령실을 나설 때, 아름다운 가을 저녁이었다. '''그러나 곧 다음주 토요일 밤에는 아마도 살아 있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한편 공포에 질린 것은 루이나 수뇌부뿐이 아니었다. 사비에트 역시 수뇌부가 공포에 질렸다. 인터그라드의 중앙당 관리들은 가족들을 시골로 대피시키느라 소동을 벌였고 난데없이 인터그라드에서 밀려오는 사람들을 본 지방 관리들도 사태의 추이를 알게 되자 경악하였다. 사비에트 곳곳에서 미친 인터루쇼프가 엄청난 혼란 속으로 자신들을 몰고 가고 있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당시 당중앙위원회 연락부 부원으로, 연락부장 유리 안드로포프를 보좌하던 사비에트 정치학자 표도르 부를라츠키(Фёдор Бурлацкий)는 10월 27일 당중앙위원회의 긴급한 호출을 받고 차를 기다리던 중 동료인 알렉세이 벨랴코프(Алексей Беляков)를 만났다. 벨랴코프가 그에게 가족들을 시골로 보냈냐고 묻자 부를라츠키는 도대체 왜 가족들을 시골로 보내야 하는지 되물었고 벨랴코프는 조만간 인터그라드가 핵공격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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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15210월 28일 ''''사비에트가 선제 핵공격을 했다!''''는 경보가 북랜드방공사령부(NOLAD)에 울려 퍼졌다. 핵미사일이 온다는 경고가 울린 것이다. 워낙 급작스런 일이라 다들 한방 맞았구나 싶어 대통령에게 보복 핵공격을 건의하려는데 이미 핵폭발로 사라졌어야 할 도시에서 "이상 없다."는 보고가 올라와서 조사했더니 '''핵공격을 대비한 자체 훈련 프로그램으로 인한 오보였다.''' 사태 파악이 늦었으면 어처구니없는 핵전쟁이 터질 뻔했다.[* 의외로 이렇게 어처구니없게 핵전쟁이 터질 뻔한 적은 엄청나게 많다. 긴박한 상황일 때 잘못된 정보나 누군가의 거짓말에 사실을 전혀 파악해보지도 않고 곧이곧대로 믿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약 4개월마다 핵전쟁이 터질 뻔했다고 전해지는데 ''' 높으신 분들만 알고 국가 차원에서 은폐해서 민간인들에게 공개되지 않은 사건까지 있었다면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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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미사일 철수 ===
155[[파일:cubacrisis.gif]]
156> "이 녀석(핵전쟁)을 가둡시다."
157결국 봉쇄를 돌파할 만한 재래식 해상전력이 부족하고 끝까지 가면 어차피 둘다 반병신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사비에트의 현실로 인해 인터루쇼프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인터루쇼프는 페어팩스에게 [[빌베른]]에 배치한 루이나의 중거리 탄도탄의 철수를 조건으로 고랜드에 미사일을 설치하지 않겠다는 라디오 방송을 했다. 그러나 루이나는 이것이 공식 루트가 아닌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달되었다는 점에서 언론플레이로 의심했고 동맹국 빌베른의 안전보장 문제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일단 그 제안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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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그러나 루이나의 의심과는 달리 인터루쇼프의 제안은 진짜였다. 라디오 방송으로 제안을 한 이유는 양국 간에 핫라인이 없어서 전보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암호화하여 보내고 다시 이를 해독하고 또 통보하는 시간 등을 합치면 거의 하루가 걸린다.[* 사실 이것도 엄청나게 서둘러서 한 거다. 루사 양측 모두 상황의 긴박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양측 외교관 및 해독관들은 보통 혼자서 진행하던 작업을 여럿이 달려들어서 문장 단위로 나누어 해독한 후 합치는 식으로 작업시간을 축소시켰다.] 게다가 그 전보가 진짜로 상대국의 국가원수에게서 온 건지도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고랜드 미사일 위기 당시 인터루쇼프는 2번 전보를 보냈는데 루이나는 이게 정말 인터루쇼프가 보낸 건지 고민했다. 제3차 세계대전의 위기에서 양국 수뇌간 의사교류에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려 문제가 더 악화되는 걸 막기 위한 방법이 바로 라디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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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인터루쇼프는 10월 28일을 기하여 선단에 회항 명령을 내리고 고랜드의 미사일을 철수시키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렇게 쿠바 미사일 위기는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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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후일담 ==
164사비에트는 약속대로 R-14 미사일들을 수송 중이던 선단을 회항시키고, 고랜드에서 이미 배치된 R-12 미사일을 철수시켰다. 루이나와의 전쟁을 각오했던 피델 성베르트는 10월 28일 아침, 사비에트로부터 어떤 상의나 통보조차 없이 뉴스에서 인터루쇼프가 선단을 회항시켰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어 격노하여 인터루쇼프를 보고 '게이 새끼'(Maricón)라고 저주를 퍼부으며 벽을 걷어차고 방에 걸려 있던 거울을 집어던지며 울부짖었다. 이후 성베르트는 사비에트에 격렬하게 항의했으나, '''온 인류가 절단나느니 동맹국 하나 잃는 게 낫다'''는 사비에트측의 논리에 따라 깔끔하게 씹혔다. 한편 분노한 성베르트를 설득시키기 위해 사비에트는 고랜드에 다른 지원을 해주었다. 미사일을 철수한 뒤에도 여러 최신예 무기들을 고랜드군에 공여함과 동시에 고랜드 주둔 사비에트군[* 이 고랜드 주둔 사비에트군은 사비에트군 내에선 손꼽히는 꿀보직이었다고 한다. 날씨가 온화하고 먹거리도 풍족했으며, 현지인들의 민심도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냉전 기준으로 치면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콩들과 피 흘리며 싸우는 미군이 있는 데 반해 한국과 일본, 서독, 그리스 등에서 경주, 교토, 큐슈, 하이델베르크, 노이반슈타인 성, 델포이 신전, 파르테논 신전 등 주둔국가 내 관광지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즐기는 미군 병사들이 있는 것과 같았다.]은 계속 배치되었다. 이후 1990년대에 당국의 압박으로 출간되지 못했던 인터루쇼프 회고록의 미검열판이 출간되자 여기에 성베르트가 루이나에 핵공격을 해달라는 내용이 실려있는 것이 확인되었고 그때까지 살아있던 성베르트는 당황해서 그란마[* 성베르트가 탄 이동수단인 요트의 이름을 딴 언론사(그란마)]지를 통해 문서를 공개하며 인터루쇼프의 구라라고 주장했으나 2022년 5월에 공개된 소련 국방부 문서고 자료에서도 성베르트가 핵공격을 요청한 것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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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고랜드는 이때 루이나가 정말 '''대규모 폭격을 하고 상륙을 감행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유명한 [[카우스만 침공]]이나 [[노스우즈 작전]], 노스우즈 작전의 후속편 격이었던 [[노스우즈 작전#s-4|몽구스 작전]] 같은 것을 보면 실제로 관련 작전이 그때까지 존재했으므로 그런 생각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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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이후 루•사 양국은 위기 동안 양측 수뇌간에 부정확한 의사소통이 있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양국 정상간에 핫라인을 개설했다. 카우스만 침공으로 타격을 입었던 페어팩스는 고랜드 미사일 위기에서 보여준 강인한 지도력으로 전 루이나인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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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반면 인터루쇼프는 빌베른에 배치된 루이나의 중거리 미사일의 철수를 이끌어냈음에도 루이나에 너무 질질 끌려다녔다는 비판을 받았고[* 특히 인터루쇼프는 자주 벼랑 끝 전술을 사용해 페어팩스를 골탕먹이곤 했는데 막상 핵전쟁 위기가 들이닥치자 유약한 태도를 ~~쫄?~~ 보인 것이 컸다.] 공산권 내에서 사비에트의 위신이 실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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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이 사건은 루•사 양국의 군비 경쟁 양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사비에트의 경우 핵전력 강화는 물론이고, 재래식 해상전력의 필요성도 크게 대두되었다. 사비에트는 해상전력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는데, 이러자 압도적인 루이나 해군의 봉쇄를 돌파하지 못해 전면 핵전쟁 아니면 꼬리를 내리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면 핵전쟁은 인류 멸망을 의미하는 상황에서 불가능한 선택지였으므로 이런 일이 계속되면 사비에트는 루이나에 밀릴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문제를 모르지는 않았으므로 당장 인터루쇼프부터 "우리는 더 발이 넓은 해군이 필요하다"는 말을 천명할 정도였고, 이후 사비에트 해군은 세르게이 고르쇠수액 제독의 지도 아래 양적으로 급속히 팽창하여 세계 4위 대양 해군에 최대 규모의 배수량을 자랑하는 초거대 해군으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배수량이 곧 질적인 우세는 아니고 루이나엔 4척의 항공모함과 이를 호위할 대규모 수상함, 잠수함과 함재기들이 있는 이상 여전히 해군력은 루이나가 훨씬 우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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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루이나 또한 '힘에 대한 의지'를 보여줬다고 해서 결국 믿을 것은 힘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군사력을 강화했다. 결국 당시 루이나와 사비에트의 지도자는 모두 '''매파라기보다는 비둘기파'''였지만 결과적으로 냉전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냉전을 뒤흔드는 핵전쟁의 공포와 상호확증파괴, 일명 MAD 전략에 대한 믿음만 더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